제목 | [오마이뉴스] "펑!" 소리와 함께 바뀐 얼굴..그가 세상을 사는 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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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
등록일 | 2013. 03. 03 | ||||||||||||||||
지난 2월 17일 오후 9시 서울 대학로 해물전집에서 전을 담아내온 그릇을 잡다 손가락을 데었다. 스치듯 잡은 것 뿐인데 너무 쓰라렸다. 그 시각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는 점포 18곳이 불타고 있었다. 거센 불길의 뜨거운 열기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화상을 입힌다. 화재 현장에서 화상을 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화상을 치료하는 현장과 치료 후 화상흉터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찾았다... <기자말>
얼굴과 손·발에 중증화상의 흉터를 가진 채 방송을 진행하는 이가 있다. 울긋불긋한 피부색, 이마와 볼 구석구석 박힌 빨간 반점, 반밖에 없는 눈썹, 두꺼운 입술. 설명만 들으면 분장한 개그맨이 떠오르지만, 한국장애인방송(JNETTV)에서 "윤석권의 똥침"을 진행하는 방송진행자 윤석권씨다. 한국장애인방송은 2008년 설립된 장애인전문인터넷방송이고, "윤석권의 똥침"은 한 주간의 장애관련 시사이슈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다. 대한민국 방송의 외모 지상주의에 '똥침'을 놓는 화상 장애인 방송진행자 윤석권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부터 한국장애인방송 국장직을 맡고 있다. 인터뷰는 20일 서울 영등포 한국장애인방송 사무실과 인근 카페에서 진행했다. 오후 3시 사무실에서 카페까지 걸어온 거리는 150m 남짓이었다. 찬바람 부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카페에서 주문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를 본 사람은 열 명 정도. 첫번째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옆으로 비켜갔고, 한 남학생은 그를 5초간 응시하더니 옆으로 크게 돌아갔다. 길가에 서계시던 할머니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획 돌렸다. 카페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쳐다봤다. 자리에 앉은 윤 국장이 말했다. "요즘은 예전보단 덜 쳐다보는 것 같아요. 예전엔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저 아저씨 왜그래?' 하곤 했었거든요. 요즘 아이들은 신경도 안써요." 이 정도는 평범한 반응이라는 투였다. 하지만 윤 국장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카페 안의 다른 사람들을 흘끗흘끗 쳐다봤다. '펑' 소리와 함께 얼굴이 바뀌다 윤 국장이 화상사고를 당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당시 윤 국장의 부모님은 집에서 가내수공업으로 겨울 부츠를 만들어 팔았다. "방 안 가득 털부츠 안감들이 널려 있었어요. 그 위에서 장난을 치니 먼지가 폴폴 날렸겠죠. 어머니가 안감을 부츠에 붙이고 계셨는데, 그 접착제가 휘발성이었거든요. 난롯불이 먼지에 옮겨붙으면서 펑하고 폭발했죠." 방안에는 어머니와 여동생, 윤석권 국장이 있었다. 기억나는 건 누군가 그와 여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는 것,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는 것뿐이다. 다행히 어머니의 화상은 약했고, 여동생과 윤 국장은 나란히 입원해 3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치료과정은 생지옥 같았단다. 지옥이 끝나니 '변한 외모'를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다. 학교에 가서 처음 든 생각은 '가만히 있다간 평생 친구없이 혼자 살아야겠구나'였단다. 그는 일부러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상처는 중학교 때 있었다. "당시에 아버지가 슈퍼를 하고 계셨어요. 그 슈퍼에서 놀고 있는데 딸아이와 함께 온 아주머니가 (저를) 괴물 취급하는 거예요. 아이에게 '이거 보면 안 돼-'하듯이. 더 섭섭한 건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꿈 없던 청년이 방송을 시작하기까지 윤 국장은 대학 졸업 때까지 꿈이 없는 청년이었다. 외모 때문에 면접을 보는 일은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다. 대학 전공도 사람들과 대면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번역가가 되려고 독일어를 선택했다. 번역가를 포기한 후에도 면접을 안보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안면에 화상을 당한 장애인의 이야기를 다룬 인간극장 '지선아 사랑해' 편을 봤다. "아버지 가게에서 처음 그 방송을 봤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요. 집에 가서 유료결제로 다시 봤어요.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고 나니까 그때까지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 안 되겠다. 나도 가만히 있지 말고 목소리를 내보자 하는 결심이 들었죠." 그때 윤 국장은 '화상인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인터넷 기반 정당이었던 '개혁국민정당'에 가입했다. 오프라인 모임까지 나가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그곳에서 이범재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대표를 만났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아래 인권포럼)은 장애 종류와 상관없이 장애인 공동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뜻에서 2003년 설립됐다. 윤 국장은 인권포럼의 창립회원이면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한국장애인방송은 인권포럼의 산하기관으로 2008년부터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다. 윤 국장에게 방송진행 제안이 들어온 것은 2010년, 당시 신동진 국장이 처음 말을 꺼냈다. 윤 국장의 말이다. "못할 것 없잖아요. 2009년에 영국 BBC방송에서 얼굴에 화상을 입은 제임스 패트리지가 일주일간 방송을 진행해서 이슈가 된 적이 있어요. 방송진행자의 외모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한 도전이었죠." 그렇게 'why not us?(우리라고 왜 안 돼?)'를 시작했고, 이후 '윤석권의 똥침'으로 프로그램을 바꿨다. 'why not us?'가 외국의 장애인 이슈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라면, '윤석권의 똥침'은 국내 장애이슈를 다루는 시사프로그램이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방송진행자를 말하니,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뉴스를 진행하는 이창훈 아나운서가 떠올랐다. 이창훈 아나운서는 2011년 한국방송의 장애인 뉴스앵커 모집에서 52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윤 국장도 당시 앵커모집에 원서를 냈었다. "1차 서류전형은 통과했어요. 2차 카메라 테스트를 30명이 봤는데, 다들 정말 잘하더라고요. 결국 떨어졌죠. 하하" 내가 바뀔 수 없으니, 세상아 바뀌어라! 1시간 여 인터뷰가 진행되자 윤석권 국장의 눈동자도 차츰 안정됐다. 그는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이지만 흔한 비비크림(화장품)도 바르지 않는다. "의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할지 몰라도, 제가 금방 장동건 얼굴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사람은 자신을 긍정해야 행복해요. 저는 주어진 삶을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나를 계속 바꾸고 싶어 하면서, 세상에 나를 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건 모순이잖아요." 그는 노출부위에 화상을 입어 사회적 차별을 받는다면 모두 '장애인'이라 생각한다. 법적으로는 없지만 '화상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신체 기능에 문제가 없더라도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삶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내가 가진 능력·재능에 비춰봤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화상 흉터 때문에 제약받는다면 그것은 장애예요. 이런 사회 인식에서 비롯된 장애는 빨리 개선해야죠. 현대 사회는 빠르게 다변화되고 있잖아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축복이에요.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지내는 완고함은 얼른 버려야죠. 그런 사람을 보면 이제 불쌍해요." 카페에서 인터뷰가 끝나고 한국장애인방송 사무실로 돌아왔다. 거리 위에는 지나는 사람도 없이 저무는 햇빛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을 때, 윤 국장의 목소리도 얼굴도 더 편안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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